지난밤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추적거리는 소리는 듣기 좋았지만, 빗소리가 마음을 씻겨내려 주지는 못하였다. 쵸로스케는 심란함을 가득 담은 얼굴로 꽃꽂이에 열중했다. 가문의 장남이었다. 어느 것 하나 빠지는 부분이 없어야 했음이 당연했다. 본가를 떠나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어여쁜 동생을 영원히 보지 못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스쳐지나갔다.
다요코. 절색은 아니었지만 매력적이 아이였다.
'좋은 집안에 시집 가는건 보고 가야 하는데...'
쓰디쓴 입맛을 삼킨 쵸로스케는 꽃꽂이를 대충 마무리하곤 짐을 챙기기 위해 장지문을 나섰다.
2.
곰곰이 정신을 잃기 전을 회상하던 쵸로스케는 낯선 이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 틈엔가 열린 장지문 틈새로 화려한 기모노가 눈에 띄었다. 사박사박, 다다미를 밟는 발소리가 쵸로스케의 귓가를 간질였다.
“아... 구해주신 겁니까? 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 여기는...”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들고 있던 대야를 내려놓곤 물수건을 짜냈다.
“자아, 설명은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은 환자니까 눕도록 하지.”
오묘했다. 쵸로스케에게 다가온 기모노 차림의 사내는 남성이라기엔 묘하게 사람을 홀리는 색기가 있었고, 여성이라기엔 지나치게 남자다운 생김새였다. 남자인가? 쓸데없는 일로 골몰하는 쵸로스케를 보며,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가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카라마츠다.”
“하?”
“이름, 카라마츠. 엄연히 남자라고?”
키득이는 앳된 얼굴로 미루어보아 나이가 그리 많은 것 같지는 않았다. 많아봤자 열대여섯 즈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지켜보는 쵸로스케를 느끼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카라마츠는 곱게 눈웃음 지으며 호선을 그린 입술을 열었다.
“여기는 유곽이다. 보시다시피 나는... 말 안 해도 알겠지. 필요한 게 있으면 사람을 불러라. 그대는 환자이니, 어느 정도는 말 하지 않아도 보살펴 줄 거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쵸로스케가 잊고 있던 것을 상기하곤 카라마츠가 일어서기 전에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실례지만 한 가지만 더 부탁드려도 될런지요, 저는 마츠노라는 분을 찾아 왔습니다만... 혹시 마츠노씨를 아십니까?”
“나다.”
“......하?”
“마츠노 카라마츠. 유곽 아카츠카의 오이란이다.”
3.
“쵸로마츠으-”
“왜요.”
외딴 섬의 유곽에 몸을 의탁한지도 꽤 오랜 날이 흘렀다. 낮과 밤이 바뀐 횟수는 벌써 한참 전부터 열 손가락을 넘어 섰지만, 계절은 변함없이 한창인 봄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마당의 커다란 벚나무에선 연일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을 만큼의 연분홍 꽃비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아하하, 쵸로마츠. 왜 또 그렇게 심통이 나 있나?”
밝게 웃으며 가까워지는 카라마츠의 발자국 소리가 사박사박 소리를 내며 정원의 풀 잎사귀 사이로 흐드러졌다. 유곽의 정원은 굳이 손질을 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깎아지른 듯 한 암반과, 절벽 위로 흐드러진 꽃나무와, 바닷바람을 맞고 자랐다고는 생각 할 수도 없을 만큼 생기와 활기가 넘치는 꽃밭. 초록으로 눈이 부신 금잔디까지 모든 것이 본가의 정원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만한 장관을 이루었기에 쵸로스케는 매일같이 정원으로 발걸음 했다. 쵸로스케가 가는 곳 마다 검딱지처럼 붙어 따라다니던 카라마츠의 덕이었을까, 그간 쵸로스케도 카라마츠와 꽤나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매일 밤 찾아와 시중을 들겠다며 옥신각신 하는 것은 제외 하고, 의도 한 건지 아닌 건지 가끔가다 가슴이 저밀정도로 두근거리게 하는 것만 빼면 섬의 유유자적한 생활도 그럭저럭 지낼 만 하다고 생각했다. 부드러운 봄바람에 실려 옷자락이 팔락였다.
1.
“새 술탄의 탄생입니다!”
팡! 소리를 내며 터지는 폭죽과 여인들의 손에서 흩날리는 꽃가루. 황금색의 휘장, 금으로 세공한 세공품들이며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연회장, 연회장의 끝에 마련된 금으로 지어진 황금 왕좌에서부터 입구까지 이어진 붉은 융단의 위로 황금색의 예복을 입은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왕좌를 향해 걸어갔다.
융단의 좌우로 늘어선 군병들이 검을 하늘로 높게 들고는 지나가는 남자를 향해 경외, 공포를 담은 눈으로 바라보며 인사하듯 눈을 감는다.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남자는 어느새 왕좌에 당도해 그 자리에 앉아, 황금색의 예복을 입은 중년 여성이 씌워주는 왕관을 쓰자 연회장에 들어선 모두가 환호를 하며 만세를 외쳤다.
2.
그의 친정을 기념하는 축제가 시작되고 있었다. 거리에 장식되는 금빛 장신구며, 종이로 된 꽃이며 거리로 나오는 가판대, 밤까지 이어지는 시장.
“오-, 무슨 축제라도 있나보군!”
후드를 눌러 쓴 일행 중, 앳되어 보이는 이가 거리를 보며 감탄했고, 가판대며 상점이며 신이 나 돌아다니는 것을 그의 일행이 잡아 말리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여비가 다 떨어져가는 것을 잊진 않은거지?”
또 다른 후드를 쓴 이가 신이 난 이의 뒷덜미를 잡자, 쓰고 있던 후드가 벗겨지며 청안의 앳된 소년이 머쓱히 웃으며 미안하다고 사과해왔다.
“정말이지, 다음에 또 그러면 그때는 확 널 팔아서라도 돈을 구할 거니까!”
소년의 뒷덜미를 강하게 잡으며 얘기하는 이의 목소리가 더위에 앙칼지게 날이 서 있었다. 다시금 사과하는 목소리에도 쉬이 받아주지 않자 소년은 그런 동료를 끌어안으며 용서해달라고 간질이자 참을 수 없었는지 버둥거리며 알았다고 외치는 와중에 동료의 후드도 벗겨졌다. 소년과 똑 닮은 외모에 똑같이 긴 머리카락을 단정히 묶고 있는 소년과 달리 풀어놓고 있는 머리카락은 크게 구불거리는 것이 소년과의 단 하나의 차이점이었다.
3.
문을 열자, 웅성거렸던 바깥은 어느새 좌우로 늘어선 테이블 중 좌측 테이블에는 다양한 얼굴색이며 생김새를 가진 남자들이 앉아있었고, 우측 테이블에는 화려한 장신구며 카라코가 감탄한 비단으로 지은 옷을 입은 여자들이 앉아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헐벗다 싶은 여성들이 음식을 가져오고 있었다.
그 가운데 금실자수가 놓인 보로 덮은 테이블에 앉아 심드렁한 얼굴로 금잔에 담긴 와인을 마시는 남자는 말하지 않아도 사리스가 언급한 술탄임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술탄이시여, 제가 말씀드린 그 유랑극단입니다.”
쵸로마츠의 뒤에서 허리를 살짝 숙인 채 예를 올리며 말을 올리자 그의 말에 술탄은 고개를 끄덕이자 등 뒤에 서 있던 사리스가 시작하라는 듯 손짓했다.